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지난달 13일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은 ‘박물관 프로그램 및 서비스 분야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우피치미술관은 수백년 동안 피렌체의 학문과 예술 진흥에 힘쓴 메디치가가 남긴 유산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작품이 소장돼 있다. 독살설이 전하는 프란체스코 1세(왼쪽)와 범인으로 의심받은 동생 페르디난도 1세(오른쪽)의 초상화도 있다. 미국의학저널 제공광고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34번째 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권력 앞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잘 보여준다. 왕위가 탐나 어린 조카인 왕(단종)을 끌어내린 삼촌(세조)이 그렇고 이런 형을 내쫓으려는 동생(금성대군)의 역모가 그렇다.이렇다 보니 권력자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음모론이 따라온다. 예를 들어 정조가 종기 치료를 받다가 의식을 잃고 사망하자 당시 왕과 대립하던 노론 벽파에서 독살했다는 설이 퍼졌다. 그럼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사인이 미스터리로 남았고 오늘날 의학계는 치료 과정에서 패혈증 같은 치명적인 상황이 온 게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광고유럽 역사에서도 이런 음모론이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1587년 제2대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부부의 죽음이다. 당시에는 열병으로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그의 동생이자 뒤를 이어 대공이 된 페르디난도 1세가 독살했다는 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프란체스코 1세는 본처가 죽자 정부였던 비앙카 카펠로와 바로 재혼했고 평소 형과 사이가 나빴던 동생은 새 형수를 무척 싫어했다. 그럼에도 새 대공비는 형제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1587년 10월 피렌체 외곽의 별장으로 초대해 며칠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사냥을 다녀와서 대공은 오한을 느꼈고 평소 통치보다 화학(연금술) 실험에 열심이었던 그는 직접 약을 제조해 치료하다 병세가 심해져 11일 만에 사망했다. 며칠 늦게 증세가 시작된 비앙카도 하루 뒤에 남편을 따라갔다.광고광고페르디난도는 즉각 두 사람의 부검을 지시했고 의사들은 ‘예상대로’ 독살의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다. 페르디난도는 형수의 장례를 허용하지 않았고 메디치가의 묘지에도 묻지 못하게 했다. 이런 행동들이 오히려 독살설에 힘을 실어줬고 그 뒤 수백년 동안 이어졌다.반면 훗날 의학자들은 당시 그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로 죽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실제 프란체스코 1세의 어머니와 두 동생(조반니와 가르치아)도 1562년 교외 별장에 머무르다 열병에 걸려 모두 사망했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는 20세기 중반에야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광고대공 부부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있고 419년이 지난 2006년 학술지 ‘영국의학저널’에는 독살설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피렌체대 연구진의 논문이 실렸다. 보관 중인 프란체스코 1세의 장기 시료를 분석한 결과 간에서 비소가 검출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0년 이탈리아 피사대 연구진은 학술지 ‘미국의학저널’에 실은 논문에서 프란체스코 1세의 척추뼈에서 말라리아원충의 항원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대공 부부는 말라리아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지난주 학술지 ‘아이사이언스’에는 2010년 논문을 지지하는 피사대와 미국 예일대 연구진의 논문이 실렸다. 이들은 프란체스코 1세와 함께 그보다 25년 앞서 죽은 동생 조반니의 뼈 시료를 분석해 두 사람 모두에게서 말라리아원충의 게놈을 확인했다. 이는 항원보다 확실한 증거다.이번 연구를 두고 언론에서는 “대공 부부의 사인 미스터리가 풀렸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논문에서는 “원충의 존재 자체가 반드시 죽음의 원인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런 죽음의 미스터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