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광고193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희극배우로 인기 절정이던 찰리 채플린(1889~1977)이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에 아인슈타인을 초대했다. 먼저 채플린이 강당에 들어서자, 청중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곧이어 아인슈타인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이를 지켜보던 채플린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마디했다.“사람들이 나를 향해 환호하는 이유는 모두가 나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향해 환호하는 이유는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채플린의 몸짓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이론을 빗댄 얘기다. 채플린의 이 재담에 아인슈타인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고 전해진다.광고오늘날 채플린의 길을 좇으려는 젊은이들은 많고, 국내에도 이미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아인슈타인의 길을 좇으려는 사람은 훨씬 적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여기에 속한다. 아인슈타인 같은 예외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중의 환호도 받기 어렵고 갈 길은 험하기만 한데, 왜 굳이 그 길을 택하려 하는가?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내 회고록(‘공부도둑’, 2008년)에서 나 자신을 ‘공부도둑’이라고 자리매김한 일부터 설명해야겠다. 여기서 ‘도둑’은 조선시대 문장가 강희맹(1424~1483) 선생의 글 ‘도자설’(盜子說)에서 채용한 말이다. 아들 도둑을 교육하는 아비 도둑의 이야기인데, 둘이 어느 집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던 가운데, 아비 도둑이 먼저 나와 창고 문을 밖에서 잠그고 도망쳤다. 당황한 아들은 쥐가 벽을 긁는 소리를 내어 주인을 깨운 다음, 주인이 살펴보려 창고 문을 여는 순간 뛰쳐나와 위기를 피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렇게 위기 극복 능력을 스스로 터득한 아들 도둑이 결국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강희맹 선생은 도둑 부자의 예를 들어 학문도 어려움을 딛고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광고광고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나 자신을 ‘도둑’이라 칭하면서, 남의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내는 도둑이 아니라 학문의 창고에 들어가 앎을 훔쳐내는 도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나는 전 우주의 학문 보물창고에 들어가서 학문의 정수들만 다 골라 훔쳐내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물창고에 어떻게 진입하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창고에 따라 각각 모양이 다른 수많은 열쇠가 필요하다. … 그런데 고수 도둑은 한두개 문만 여는 열쇠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스터키’를 마련한다. … 그렇다면 학문의 창고에도 마스터키가 있을까? 마스터키는 없지만 마스터키에 아주 가까운 것은 있다. 그게 바로 물리학이다.”광고이런 공부도둑이 되기 위해 나는 물리학을 택했고, 그 정점에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아들 도둑이 겪었듯이 나도 물리학이라는 마스터키 하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첫번째 어려움은 아주 일찍 닥쳤다. 초등 교육의 중도 단절이다. 1950년 6학년이 되자마자 터진 6·25 전쟁으로 경북의 외진 시골 마을인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도 최소한 초등학교는 마치는 게 관례였지만, 더 이상 학교 다니지 말라는 엄명이 내게 떨어졌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의 누구도 할아버지의 이 수긍할 수 없는 처사를 거역하지 못했고, 졸지에 나는 시골 농사꾼이 되었다. 춘천·청주 등 도시에서 자란 내게 이 생활이 익숙하지도 않았던 것은 물론,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나는 아버지, 삼촌 등 주위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으며 내 생애 처음으로 혼자 공부하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학력도 인정해 주지 않는 비정규 고등공민학교에서 일년 정도 빈약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나중에 일반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편입할 때까지 그저 독학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이런 공백기를 거쳐 내 동급생들이 올라간 학년으로 가까스로 복귀했는데, 편입해 보니 영어 능력은 많이 떨어졌으나 수학 공부는 오히려 내가 앞서 있었다.이것은 바로 창고에 갇혔던 아들 도둑이 아버지가 준 시련을 어렵사리 헤치고 나온 경험과 흡사하다. 이를 통해 나는 “공부는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것, 그리고 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관념 속에서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됐다. 이러한 경험이 특히 소중한 것은 창의적 학문이야말로 내 힘으로 나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아이작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 어려서 학교를 중단하고 혼자 공부해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이런 ‘혼공’(혼자 공부)의 이력이 창의적 작업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광고두번째 난관은 사실 스스로 자초했다. 엉뚱하게도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나는 당시 취업형 공업고등학교를 지금의 과학고등학교 정도로 오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일이 내 마스터키인 물리학을 택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당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기에 담임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러브(Love)라는 사람이 쓴 미적분학 입문서 번역본을 빌려 읽게 되었다. 공업고등학교인 만큼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 책의 핵심 내용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는데, 이것이 내 독자적 학습 경험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이 학교에서는 물리 과목 수업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내가 물리학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물리 수업이 시작될 무렵 담당 교사가 떠나 결원이 되었고, 나는 교과서만으로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하다 보니 물리학이 너무 재미있었고, 아예 학문 진로를 이쪽으로 바꾸어 버렸다.이렇게 나는 두번째 난관을 뚫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이제 원하던 물리학을 마음껏 공부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내가 꿈꾸던 최상의 여건을 맞은 셈이다.그러나 예상치 않게 세번째 난관이 곧 닥쳐왔다. 서울대 물리학과 생활은 명목상의 모습과는 달리 적어도 내겐 썩 좋은 여건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강의 진행 방식이 내가 학습하던 방식과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전체의 핵심을 일단 파악한 뒤 이를 중심으로 현재 논의되는 내용을 정리해 나가는데, 강의는 교과서 목차들을 기계적으로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좋은 교재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교재도 주로 외국어여서 쉽게 해독할 수 없었다. 또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공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교육적, 경제적, 시간적 여건 모두가 내게는 잘 맞지 않는 상황이어서, 부산히 공부하는 척만 했지 정작 내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은 거의 없었다.이렇게 허울뿐인 대학 4년간을 마치고 병역의무 수행 겸 공군사관학교 물리학 교관이 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내게는 조용히 내 학문의 바탕을 정리할 기회가 되었다. 다행히 물리학 전반의 내용을 간결하게 서술한 책 한권을 구해 그간 내가 공부한 물리학의 주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낼 수 있었다.내친김에 외국 대학원에서 중점적으로 공부한다는 이른바 물리학 핵심 과목들에 해당하는 책들도 한권씩 구해 읽어 나가면서 내 나름의 물리학 이해를 구축했다. 이것은 그 후 미국 대학원 과정에서 학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곳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로써 나는 학문의 마스터키라 할 물리학을 손에 쥐고 본격적인 공부도둑 노릇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공부도둑, ‘물리학’이란 마스터키를 얻다
193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희극배우로 인기 절정이던 찰리 채플린(1889~1977)이 영화 ‘시티 라이트’ 시사회에 아인슈타인을 초대했다. 먼저 채플린이 강당에 들어서자, 청중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