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구글 선호 매체 등록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남편 서도원 열사의 고문 사실을 알리고 진상 규명 운동을 하며 국가폭력을 당한 배수자 여사가 지난 24일 오전 별세했다.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제공광고‘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남편 서도원 열사의 고문 사실을 알리고 진상 규명 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국가폭력에 시달렸던 배수자 여사가 지난 2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는 26일 “서도원 열사의 아내이자 인혁당사건 관련자 림구호 선생의 빙모인 배수자 여사가 지난 24일 오전 11시14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1934년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8남매 맏이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0월 서도원 열사와 결혼했다. 4·19혁명 뒤 민족민주청년동맹 경북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을 한 남편은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 구속됐다. 남편이 옥살이하는 2년7개월동안 배수자 여사는 딸 셋, 아들 둘 5남매를 홀로 키웠다.광고석방 뒤에도 꾸준히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반발하며 민주주의 통일운동을 이어가던 남편은 1974년 인혁당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 배수자 여사는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며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함께 구속된 하재완·도예종·송상진의 아내들과 함께했다. 이 일로 그는 남대구경찰서에 잡혀가 이틀동안 조사받으며 ‘다시는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강요받기도 했다.1975년 4월8일 남편 서도원을 포함한 8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하루 뒤 사형이 집행됐다. 남편의 주검을 염하는 과정에서 그는 등허리에 구속 전에 없던 흉터 자국을 발견하고, 사형수들에게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광고광고인혁당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애썼던 배수자 여사는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경찰에 끌려가 열흘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병원에서 고혈압과 심신쇠약으로 오랫동안 치료받아야 했고, 고문에 의한 외상 후 증후군 진단을 받기도 했다.그는 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 경북대에서 처음 열린 인혁당 사형수들의 공개 추모행사에 참석했고, 1998년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이어진 ‘민족민주열사명예회복 및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위한 농성’에도 함께했다.광고마침내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을 ‘고문 조작’에 의한 사건이라고 규명했다. 이어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도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고문 조작 사실을 밝혔다. 2007년 서울지법은 인혁당 사형수 8명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빈소는 대구파티마병원 장례식장 5층 브아이피(VIP)실에 마련됐다. 26일 저녁 7시 빈소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발인은 27일 새벽 5시30분이며, 대구명복공원에서 화장한 뒤 경기도 이천 민주화기념공원에 안치된다.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