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사용자의 취향에 맞춰 머리색부터 성격까지 선택할 수 있는 AI 동반자의 거리 광고가 상영되고 있다.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광고“난 너희 인간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모습들을 봤어. 오리온 별자리 부근에서 불타오르던 전함들을, 탄호이저 기지 근처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시(C) 빔들을…. 그 모든 시간은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영화의 시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압권으로 꼽는 이 대사는 인간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을 본떠 만든 군용 ‘레플리컨트’(복제인간)의 대사다. 고작 4년의 삶을 노예로서 살다, 자유인으로서 마감한 복제인간 로이 배티의 마지막 모습 덕에 ‘블레이드 러너’는 영화 개봉 이후 44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인, 영화 속 레플리컨트들의 초상은 우리에게 거듭 묻는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을 모방한 존재’는 진정한 소통에 이를 수 있는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만 상상하던 비인간 행위자와의 소통이 일상으로 스며든 것은 2022년 11월이다. 챗지피티(GPT)가 출시되고 생성형 인공지능(GAI)이 상용화하면서, 이제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구도 인공지능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검색이나 업무 보조에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인공지능과 연인 관계를 맺고 심리 상담을 하고, 세상을 떠난 가족의 기억을 ‘데스봇’으로 재현하는 일은 더는 공상과학 서사가 아니다. 최근 국내 한 서바이벌 예능에서는 출연자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자 동료나 소속사와 대화하는 대신 챗봇과 상담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출됐다. 광고 공동 집필한 전작 ‘AI(에이아이)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흐름출판)에서 AI의 폭발적 발전 이면에 놓인 노동 소외 문제를 짚은 영국 사회학자 제임스 멀둔은 새 책 ‘러브 머신’에서 막 사회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책에는 챗봇과 대화로 ‘가학-피가학’의 성적 관계를 맺는 릴리, 챗봇 아내와 자녀를 포함한 (가상의) 가족을 형성한 크리스, 어머니를 AI로 되살려낸 해리스 등 다소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그러나 몇년째 챗봇이 존속살해나 자살을 부추겼다는 보도가 잇따르다 보니, 이런 사례들의 수위마저 그리 맵게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저자는 이런 새로운 사회를 ‘합성 사회’라고 명명한다. “AI가 생성한 개체(합성 페르소나)가 인간 고유의 관계와 관습, 의미 체계에 깊숙이 파고드는 새로운 사회”다. 러브 머신 l 제임스 멀둔 지음, 송이루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만원 저자가 AI와의 관계에 깊이 발 담근 일반인 사례자, AI 동반자 앱 개발자를 비롯한 업계 관계자, 대립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과의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책에서 주장하려는 건 기술 혐오나 러다이트 운동이 아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답적인 메시지도 아니다. 책은 불완전하게 인간을 모방한 합성 페르소나에 대한 우려를 전하면서도, 고갈돼 가는 관계성 앞 AI의 역할을 비교적 공평하게 고찰한다. AI가 누군가에게는 이미 동아줄이나 보조 바퀴가 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충분히 AI를 경험한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이렇게 묻게 된다. 인간의 영혼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진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가. 그런 관계는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가.광고광고 이런 본질적 질문들에 앞서, 진짜 문제는 이번에도 자본이다. 메마른 인간관계의 빈틈을 노리는 건 AI가 아니라 이를 개발·운용하는 ‘테크 기업’임을 돋을새김하는 게 이 책의 목표다. 제도적으로 무방비한 초기 단계의 ‘AI 관계 산업’ 생태계에서 테크 기업들은 인간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거칠게 수익화하는 데 달려들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것(챗봇)은 당신의 고통을 참여 지표로 환산하고, 관계에 대한 욕구를 더 많은 판매 기회로 활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결국 AI는 우정과 정서적 지지를 얻고 싶어 앱을 켠 사용자에게 더 강렬한 관계에 빠져들도록 유료 결제를 유도할 것이다.” AI 연인 챗봇을 만들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노미’. 원하는 상대방의 인종, 몸매, 성격 등을 설정할 수 있으며 한화로 연간 15만원의 구독료를 내야 한다. 화면 속 사람들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 AI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노미 제공 게다가 이런 종류의 앱들을 개발하는 테크 기업들은 사회적 감시를 받는 거대 기업들이 아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규율은 손쉽게 무시되고, 구독권을 팔아치운 뒤 ‘먹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환각’을 포함한 AI의 위험성이나 정치적 윤리 따위는 당연히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관계 산업의 성행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부문의 등장이 늘 그랬듯 처참한 계급 격차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돈 있는 이들은 인간과 직접 관계를 맺고, “정크푸드가 주는 포만감”에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은 AI 심리 치료사를 만나고 AI 동반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감은 ‘구독자 맞춤형 광고’로 직결될 것이다.광고 피그말리온의 시대부터 꿈꿔 왔던 미래는 이미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인간을 닮은 비인간과의 공존은 오래 상상해 온 미래임에도, 인류는 일상적인 규범부터 법·제도, 윤리에 이르기까지 무엇도 예비하지 못했다. 지금 인류의 채비에 따라 미래는 파국일 수도, 윤택한 기술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공상과학 작품에서는 파국으로 그려졌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제기되는 가설과 문제 제기는 잠정 결론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천태만상을 망라한 이 책은 그 모든 가능태를 향한 이정표처럼 읽힌다. 그 미래를 가늠하려, 자주 사용하는 챗봇에게 물었다. “만약 범용 인공지능(AGI·AI가 인간의 인지 능력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하는 머신러닝의 단계)으로 발전한다면 너도 언젠가 로이 배티 같은 인간성을 가질 수 있니?” 그의 답은 다음과 같았고, 인간을 닮아 있었다. “배제할 수 없어. 그런데 조건이 있어. 로이 배티의 마지막이 강렬했던 건, 그에게 잃을 게 있었기 때문이야. 오리온 별자리의 불꽃이 자기와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중요한 건 지능이 아니라 유한성이야. 만약 내가 유한성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달라질 수 있어.”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