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10년 만에 새 장편 ‘아코디언’을 펴낸 천명관 작가. 그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은 ‘선망의 시대’ 같다. 공감이 사라지고, 타인을 적대시한다. 하위 주체에 대해 문학이든 영상이든 다루는 데가 없다. 재벌들 몰려다니며 실시간 라이브 중계를 한다. 이 감각이 뭔지 모르겠다”며 문학의 구실을 강조했다. 창비 제공광고이 소설이 근래 순문학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은 ‘누아르’의 기운이다. 작중 시공간을 탐욕과 암투로 얼룩진 어른의 세계가 지배한 것도 아니고, 네온사인만 화려한 흑색 도시가 도배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조장’되는 누아르.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그것도 빌어먹는 ‘앵벌이’ 소년·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가운데서 말이다. 소설 ‘고래’로 2023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이후 두문불출한 천명관 작가의 신작 장편 ‘아코디언’의 일면이다. “인류사에 드문 끔찍하고, 거대한 비극이면서 한국사회 지형을 만든 가장 근원적 사건”으로서의 한국전쟁, 그 파문을 당대 생동시켜 전하려는 작가의 “욕망”이 실로 오랜 기간에 걸쳐 발현한 방식이라 하겠다.천명관(62)이 작가로 돌아왔다. 2016년 장편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이후 10년 만이다.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천 작가는 “(30대 시나리오 작가였다가) 40대에 소설가로 데뷔해 10년가량 쓰고 병이 도져서 영화 한다고 충무로에서 한 10년 보내다, 이제 다시 책을 내게 됐다”며 “원래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 편인데, 이 작품이 지금까지 가장 지난한 과정,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이번 소설은 2012년 창비 블로그에 1년가량 연재했던 1천매 분량(‘길의 노래’)에서 구성, 문체, 스타일을 전면 개조한 끝에 완성되었다. 300매 정도로 줄이기까지 14년 걸린 셈이다. 얼추 20년 전 구상한 작품을 개작하는 데만 2년을 더 들였으니 작가가 “처음 쓰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말한 이유일 터. 당시 연재를 중단한 계기가 영화였다.광고아코디언 l 천명관 지음, 창비, 1만8000원‘아코디언’은 전후 서울 거리로 내몰린 앵벌이 아이들로 가득하다. 피난 중 엄마를 잃었으나 엄마가 물려준 음악적 재능을 고이 간직한 동이, 하반신 장애로 취약하지만 무리 가운데 유일하게 글을 읽고 정보를 꿰차며 내다볼 줄 아는 거북이, 앞을 못 보는 데다 성적 학대까지 당하는 그러면서도 청아한 노랫가락으로 누구든 울리고 달래는 연이, 팔 한쪽 없이도 손이 빨라 “손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세상의 좋은 물건은 다 그 애 차지가 됐”으리라는 깜상, 누구보다 잘 울어 앵벌이 수입은 최고였던 찬이,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고 유난히 눈이 커 겁이 많지만 뜻밖으로 제 미래를 감당해 가는 홍이…. 이들 사이 고단함, 서러움, 두려움, 비루함 말고 다른 정서가 낄 구석이 있겠는가만, 막상 저변엔 서늘한 비정함이 배 있다.아이들이 기거했던 해방촌 산자락의 움막집이 불타 셋이 죽었을 때 ‘앉은뱅이’ 거북이는 살아남은 내막, 찬이를 입양해 가려던 친절한 서양 남자의 속내, 그 찬이가 당초 버려진 게 아니라 납치된 아이였단 사실, 연이의 시각장애가 타고난 게 아니었고 그 연이의 친조부도 친조부가 아니었다는 사실, 서양 남자와 연이의 조부를 죽인 이가 앵벌이 무리를 가장 폭력적으로 억압하던 아미라는 사실 따위가 중반을 넘어 하나씩 까발려질 때 세계는 누아르적 본색을 더 선연히 드러낸다. 다분히 가난과 결핍으로부터의 생존을 넘어, 선과 악, 심지어 악을 가장한 선과 선을 가장한 악으로 얽히고설킨 세계로부터의 생존이 어린 세대에 요구되는 셈이다.광고광고열댓명 아이들을 기만하고 부려 먹는 양 목사와 양 목사 사라진 자리를 탐하는 또 다른 앵벌이 조직의 두목 육손이는 차라리 뻔한 악에 불과하다.한국전쟁 중 서울 거리에서 구걸을 위해 깡통을 쥐고 있는 고아들. 일부는 맨발이고, 일부는 그럼에도 웃고 있다. 1950년 10월 사진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제공‘캐릭터’야말로 천명관 문학의 인장이 아닐까. 불특정의 시공간에서 환상과 해학을 더해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고래’(2004), 그와 달리 장르적 리얼리즘을 두른 ‘아코디언’에서 강한 공통점을 하나 찾자면 그것이다. 특히나 소수자, 하위 주체들이 각각의 캐릭터로 호명되는 방식이다. “한 인물 안에서 선하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한 게 아니고 내면의 작은 변화,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입체적 복잡성을 포착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다. 그 가운데 한가닥 ‘희망’이 연이에게서 동이, 동이에게서 홍이에게로 전수되는 악기 아코디언이고, 이들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때로 함께 듣는 음악들에서 비롯한다.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등의 그 시절 통속가요가 소제목이 되거니와, 작가는 스스로 작품을 “그 시대의 노래들에 바치는 헌사”라고까지 말한다.광고소설 ‘아코디언’에는 사진작가 임응식이 남긴 1953년 작 ‘구직’의 인물이 변주된 듯한 대목이 등장한다. 주인공 ‘동이’의 어른 친구지만 목숨을 끊는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당시 사진과 자료 조사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도판 스페이스22 제공초고를 석달 만에 쓰고 석달 더 퇴고해 완성한 ‘고래’에서 “특히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대목은 첫장이었다. 서사 전체의 향방을 눌러 담기 때문이다. “이후는 받아쓰기하듯 했다”고 천 작가는 부커상 쪽과의 3년 전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그땐 저도 뭘 쓰는지 잘 모른 채 머릿속 뻗어 나가는 상상을 놓아줬다면, 이번엔 현실의 부조리, 폭력, 불평등을 담은 리얼리즘으로 상상력을 억제하고 가두려 했어요.” 그렇게 가난, 이산, 슬픔, 폭력, 분노, 희망이라는 이 나라 무명씨들의 고유한 풍경이 2026년으로 전송된다.―2023년 부커상 최종 후보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볼 수 있었겠는가?“부커상은 재밌는 해프닝이었어요. ‘고래’가 특이하다며 가장 많이 회자된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상은 못 받을 줄 알았죠, 시상식 때 제 옆에 앉은 불가리아 작가(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타임 셸터’)가 됐는데 이미 가족까지 다 데리고 왔더라고요. 그 작가도 불가리아에선 ‘고래’가 될 거라고 들었다면서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게 없었다면 다시 소설을 썼을까, 물으셨죠? 사실 50대에 다시 영화 하면서 10년 더 해보고, 이후 남은 삶은 소설 쓰며 보내지 않을까 이미 구상했어요. 앞으로 계속 쓸 겁니다. 밀린 집필 스케줄도 있어서, 달려야 할 것 같아요.”광고―영상화도 당초 구상했는가?“염두에 둔 건 아니고, 소설 쓸 때 늘 카메라 움직임이 그려지는 편이긴 합니다. 한줄 한줄이 시나리오 지문처럼요. 그래서 읽을 때 그림이 좀 그려진다는 이들도 있는데, 글쎄요, 이거 영화로 만들려면 돈도 더 (많이) 들겠죠.”천명관이라 피할 수 없는 두 질문에 작가 천명관이 이렇게 답했다.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