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조현이 제미나이에게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광고예수는 말씀하셨다.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며, 의사는 그를 아는 자들을 치료하지 못한다.”(도마복음 31)일반적으로 선지자나 의사가 고향 사람이나 아는 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알고 있던 선입관을 새로 찾아온 자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실망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육체의 예수만을 보며, ‘생명의 실상’(참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요한복음 9:41)라고 하셨다. 허상(겉모습)을 본다는 것은 죄이며, 회개를 통하여 하나의 실상(참모습)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여실지견·如實知見). 이때 우주에 충만한 천국(극락)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육조 혜능 대사는 무한한 공급의 원천인 하나의 생명(참나)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했다. ‘오직 생명(진리)만 실재한다’라고 하는 ‘하나의 진리’는 ‘물질(허상)이란 궁극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써 증명되고 있다. 고향 사람들은 에고(ego)로써 내면의 생명(참나)을 가리고 있기에 예수의 실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환영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인도의 철학자들이 수천년 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 즉 ‘우주는 순수 에너지의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제법실상·諸法實相, 법화경)라고 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다.광고선지자들이 깨달은 ‘하나의 진리’는 이원론적인 서구와 다른 동양의 중심사상이다. 불교는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만법귀일·萬法歸一)라고, 유교는 ‘오로지 한결같이 하여 중용의 도를 지킨다’(정일집중·精一執中)라고, 도교는 ‘하나를 얻을 것 같으면 만사는 끝난다’(득일만사필·得一而萬事畢)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의 진리’는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logos)로, 파르메니데스는 일자(一者)로, 플라톤은 이데아(idea)로 설명하였다. 신학자로서는 에리우게나, 니콜라스 쿠자누스, 에크하르트, 브로노, 슐라이어마허 등이 있으며, 아인슈타인은 에너지 일원론으로 증명하였다.성경은 ‘만물이 주(신성)에게서 나온다’(유출론, 로마서 11:36)라고, 불경은 ‘만물이 불성에서 나온다’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궁극적 실재’(절대 생명)의 현현이라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들은 에너지를 순수의식(생명)이라고 하며, 순수의식이 온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현대 물리학이 ‘모든 것은 에너지(氣)의 활동이다’(All is energy)라고 증명한 것은 우주의 근본 성품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다’라는 진리(참나)를 깨달은 선지자를 환영하지 않는 것은 이원적인 분별심(ego)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광고광고‘하나의 생명’ 차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이라는 시간은 없고(금강경), 창조론과 종말론이 있을 수 없으며, 우주가 하나의 몸이다. 예수가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생명(참나)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태복음 5:22)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분별하는 육의 ‘나’(ego)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인 영의 ‘나’(참나)이다(요한복음 6:63). 톨스토이의 신학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석 유영모는 이원적인 교리(사도신경)를 비판하며, ‘그리스도(독생자)는 예수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8)고, 승찬 대사는 ‘불안은 이원성의 망상 탓이며, 광명과 함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신심명)고 하였다. 보이는 이 세상은 꿈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의 진리’는 실재한다는 것이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원적인 고향 사람들이 둘이 아닌 진리의 실상(참나)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지하기에 어둠 속에서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것처럼 허상(거짓 나)을 보는 것이다. 불교의 무명(無明)은 사물의 형상에 미혹하여 본질적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광고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이며(양자역학), 오직 생명(진리)뿐이다(요한복음 17:21). ‘생명뿐이다’라는 것은 생명 외에는 토끼의 뿔처럼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란 내면의 생명(신성, 불성)을 깨닫는 것이며, 이원성(ego)의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성불·成佛). 분별하는 이원성(ego)의 고향 사람(거짓 나)들은 무분별의 선지자(참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내면의 그리스도, 즉 불교의 본래면목’(참나)을 꾸준히 생각하는 자는 ‘신(부처)과 하나’가 되어 불생불멸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염불시불·念佛是佛). 선지자의 고향 사람처럼 참모습(예수)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는 겉모습의 허상만을 보면서 불평과 고통스러운 삶을 보낸다. 그러나 내면의 생명(참나)을 깨닫게 될 때 인생과 우주의 근본 바탕은 하나라는 진리를 자각하여 천국(극락)의 환희와 더불어 얻고 잃음의 분별을 일시에 놓아버리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신심명).구자만 박사(개신교 장로·신학 박사·신흥지앤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