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 호텔에서 스타벅스 ‘탱크 데이’ 논란 관련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광고광고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큰 권한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원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지배주주가 있는 한국의 대기업이다. 상법과 자본시장법을 잇따라 개정하며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하는데도 요지부동인 곳이 많다. ‘탱크 데이’ 이벤트로 큰 파문을 일으킨 신세계그룹을 보자. 정용진 회장이 5·18 폄훼에 ‘격노’해 스타벅스코리아 손정현 대표를 즉시 해임했다는 게 지난 19일 그룹의 발표이다. 그런데도 ‘꼬리 자르기’라는 말이 나오고 파문이 확산하자 일주일 뒤 정 회장이 직접 사과문을 읽으며 고개를 숙였다.광고광고 궁금해졌다. 손 대표야 해임될 만하지만 정 회장이 무슨 권한으로 그를 잘랐을까? 손 대표를 문책 해임할 권한은 스타벅스코리아 이사회에 있다. 정 회장은 스타벅스코리아의 모회사인 이마트 최대 주주(28.9%)이지만, 이마트나 스타벅스코리아의 사내이사(등기임원)가 아니다. 한때 이마트 이사였으나 2013년 이후에는 미등기임원으로 남아 있다. 등기임원은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영 의사결정에 최종적 책임을 지고 배임·횡령·중대재해 등이 일어나면 처벌 대상이 된다. 미등기임원은 경영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상법상 이사의 지위와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 물론 정용진은 회장이다. 하지만 편의상 직함일 뿐 법적인 지위는 아니다. 말 한마디로 자회사 대표를 자를 권한은 없다는 뜻이다. 회사가 이사회를 열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최선이지만 이번 파문을 겪는 동안 이마트나 스타벅스코리아 어느 곳도 이사회를 열지 않았다. 결국, 발표와 달리 손 대표는 자진해서 사임하는 형식으로 물러났다고 한다.광고 정용진 회장이 신세계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절차니 권한이니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말자는 게 상법을 개정한 취지이다. 이상한 것을 이제는 이상하다고 하자는 것이다. 지배주주가 중요한 결정을 다 내리면서 법적인 책임을 피하려 미등기임원으로 남는 것, 이사회가 독립적인 역할을 못 하고 지배주주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은 관행이 아니라 비정상이다. 개정된 상법의 취지대로라면 어떻게 됐을까? 회사와 전체 주주를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이사회에서 진작에 정 회장에게 경고하고 견제했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커진 것은 2022년 이래 ‘#멸공’ 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발신하고, 우익 집회를 후원해온 정 회장의 행적이 배경이 됐다. 유통·서비스업의 가장 큰 자산인 브랜드를 보호하고 주주 가치를 높여야 할 이마트 이사회가 정 회장의 튀는 행동을 보고만 있다면 직무유기다. 수습 과정도 달랐을 것이다. 손 대표에 대한 문책을 정 회장의 지시가 아니라 스타벅스코리아 이사회가 처음부터 발의하고 진상을 조사해 해임하는 조처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진 사퇴로 어정쩡하게 마무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사자가 강요에 의한 사퇴라고 반발하면 남은 임기 동안 수령할 임금을 회사가 배상해야 할 수도 있다. 정 회장은 “더 무겁게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이 말을 지키는 첫걸음은 권한과 책임이 함께하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임시 주주총회라도 열어 이마트의 등기이사로 복귀하는 게 책임지는 모습이다. 그게 싫으면 경영에서 손 떼고 최대 주주 자리에 만족해야 한다.광고 경영 실적에 부합하는 보상도 책임경영의 핵심이다. 이마트의 실적은 몇 년간 부진했다. 그렇다면 기여가 불분명한데도 거액을 수령하는 정 회장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러나게 해야 한다. 80대 중·후반인 이명희 총괄회장, 정재은 명예회장은 상근 임원으로 분류돼 지난해 각각 18억4천만원을 받았다. 총수 일가 3명이 이마트 등에서 수령한 보수만 지난해 95억원에 이른다. 큰돈이지만 주총 승인을 거치지 않고 이사회 보상위원회의 승인만으로 지급됐다. 총수 일가가 명예회장 같은 이름을 걸어놓고 거액의 보수를 챙기는 관행은 이제 주주가 용납하지 않는다. 지난 3월 고려아연 주총에서도 최윤범 현 회장의 숙부인 80대 최창근·최창영 명예회장에게 사장급보다 많은 퇴직금을 적립해주던 규정이 다수 주주가 동의해 폐지됐다. 코스피 지수가 8천 중반까지 치솟았다. 유례없는 메모리 반도체 특수도 있지만, 지배주주가 회삿돈으로 사익을 챙기고, 책임은 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한국 기업의 고질병이 개선되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