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한인섭의 시민헌법 시대 _13 선관위를 향한 시민적 분노는 십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선관위의 해체·폐지론이나,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되, 최선진국 수준의 선거관리기구로 리모델링하는 생산적 방향으로 일신시켜야 한다.연세대학교 등 전국 18개 대학 총학생회가 지난 10일 오후 6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공동 시국선언에 나섰다. 손팻말을 든 학생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다.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광고투표소에 줄을 선 국민들은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자임한다. 투표소는 선거관리위원회 이외의 어떤 공권력도 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유권자는 기표소에 들어가 조용히 붓두껍을 누르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는다. 내 촉감 속의 투표용지는 한낱 종잇조각이 아니라, 이 나라 주권자이자 대표 선출 자격을 주는 자격증이다. 그런데 줄을 선 내 손에 들어올 투표용지가 없다면? 단순한 행정 착오, 용지 수급의 실패 등 어떤 구차한 변명도 듣고 싶지 않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권자로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 불쾌감과 분노가 인다.광고 이 사태에 대해 여야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질 일도 아니고, 좌우 대립이니, 세대 간 차이 같은 말을 애당초 끌어댈 일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주권 감수성’을 발휘하여, 함께 분노해야 마땅하다. 투표는 국민 의사를 평화롭게 표현하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고,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최고의 표현 방식이다. 지금은 지극히 정상적인 투·개표 방식도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앞세대의 수많은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맞선 전국민적 분노는 4·19민주혁명으로 폭발했고,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렸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하에서 치러진 1979년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에 더 많은 표를 주었고, 그에 힘입어 반유신 투쟁은 전열을 정비했고, 유신정권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1985년 2·12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의 온갖 정치술수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투표로 양김으로 대표되는 민주세력의 집결을 이루어냈다. 그 민주 의지를 모아서 직선제 개헌투쟁은 동력을 얻었고,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이룩해 내었다.광고광고6·3 지방선거가 치러진 지난 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본동초등학교 강당에 마련된 노량진 제1동 제6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00년대 들어 세번이나 가시화된 대통령 탄핵정국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의 탄핵은 2016년 총선에서 야권 승리로 표출된 민심을 무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탄핵은 2024년 총선 민심을 무시하고 오히려 12·3계엄 폭거로 돌파구를 열겠다는 헌법 파괴 행태에 대한 심판이었다. 반면 2004년에는 성급했던 탄핵세력에 대해 국민은 총선을 통해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이렇듯 선거는 국민 의사의 소재를 확실히 일깨워주고, 앞으로 정치집단이 취할 방향을 분명히 일러주는 이정표였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구현되기에 투·개표의 중립성과 정확성은 더없이 중요하다. 선거 과정상 각종 시비는 관망하던 국민도, 투·개표에서 조그마한 잘못은 절대 용납할 마음이 없다.광고 선거관리 업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속적으로 관장한다. 선관위는 3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헌법기관으로서, 선거관리의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하여 절대적 국민 위임을 받은 기관이다. 그런데 그 국민 위임은 선관위에 선거관리의 특권적 권위를 부여한 게 아니라, 절대적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사태에 있어 선관위의 무능과 무책임은 위험 수위를 넘었다. 투표용지 부족은 국민의 참정권과 국민주권과 관련된 엄중한 헌법적 사안이기에, 투표용지가 남았을 때 예산 낭비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 사태에서는 예방적 점검도, 긴급 대응체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 같은 치명적 무능과 비효율, 무책임은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의 존립을 의심스럽게까지 한다. 지난 몇년간 선관위의 문제들이 여러 차원에서 드러났다. 현장 투·개표 관리에서의 부실함은 물론, 직원 인사에서 비리와 도덕적 해이도 심각했다. 일부 직원의 단순한 착오나 무능에 그치지 않고, 조직 차원에서 관행화, 체질화된 문제들이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선관위는 사과는 거듭했으되, 질적 개선을 위한 실질적 노력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된 데는 선관위원장과 위원이 ‘비상임’ 체제로 운용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바도 적지 않다. 현직 대법관이 비상임 위원장을 당연직처럼 맡아온 오랜 관행 탓에, 평시에 조직 전체를 상시 책임질 수장이 없다. 헌법기관에 대한 감사원의 직무 감찰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말미암아 외부적 감사는 어려운 사각지대가 생겨났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면, 높은 위상과 국민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서 내부 역량과 성실성을 끌어올리고, 철저한 책임과 감사·감찰을 제도화, 상시화해야 할 텐데 말이다. 선관위가 이렇듯 성역화, 특권화되다 보니 조직 내부의 긴장감과 책임의식이 느슨해지고, 전국적 선거를 맞이해서도 일선 직원들은 휴가 타령을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전 국민적 분노와 비난이 쏟아지자, 선관위는 형식적인 사과와 위원장의 사표 제출로 답했다. 사과는 진지한 재발 방지 조치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는데, 거듭된 사과만으로는 면피용일 뿐이다. 사표보다는 선관위 전체가 성실하게 자료를 제공하고 사실 조사에 신속히 협력할 의무가 우선이다. 사태를 정리한 다음 위원장과 위원들은 책임의 무게에 따라 탄핵 또는 직무유기 부분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선관위 자체의 철저한 구조 개혁도 필요하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란 방패 뒤에 숨지 말고, 본연의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법률 개정을 통해 상임위원장 체제를 도입하고, 실효성 있는 외부감사체제를 정비하고, 효율적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내부 재정비가 시급하다.광고6·3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검경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압수품을 들고 건물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선관위를 향한 시민적 분노는 십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선관위의 해체·폐지론이나,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되, 최선진국 수준의 선거관리기구로 리모델링하는 생산적 방향으로 일신시켜야 한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전국 재선거론’이나 ‘투표 전면 무효화’는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정치 선동일 뿐이다. 2724만명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유권자 1인당 7장 이상 투표했으니, 총투표 건수는 1억9천건 이상이고, 4천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일부 용지 부족을 들어 이 모두를 무효로 하겠다는 것은 2700만명에 달하는 유권자의 선거권을 직접 침해하는 폭거다. 이런 억지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음모론은 배격할 일이고, 그에 편승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규탄당해야 마땅하다.지난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 ‘개표소 봉쇄 시위’ 현장을 찾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부정선거 재선거’ 손팻말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선거 결과는 최고도의 확실성과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특정 정파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혹은 당선자가 스스로 사퇴한다고, 이미 치러진 선거와 개표 결과를 무효로 돌릴 수가 없다. 재선거 여부는 개별적으로 엄격한 사법심사를 거쳐 결정될 법적 사안이다. 대중의 여론이나 정치적 합의로 흥정할 대상도 아니다.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순간, 대한민국은 끝없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일각에서는 ‘사전투표 폐지론’도 들고나온다. 사전투표는 투표 기회를 확대하고, 재외국민과 부재자에게도 참정권 행사를 용이하게 하는 실효성 있는 투표 방법이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사전투표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를 개표 음모론과 억지로 연결지어 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이고, 주권자의 참여 폭을 오히려 제한하는 일이다.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통령이 투표용지의 분량이나 운송 방법과 관련된 어떤 구체적 언급을 하거나 행정 조치를 했다면 그야말로 불법적 선거 개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초래했을 것이다. 투·개표의 전 과정은 선관위의 전속적 업무 범위 내 일이고, 대통령이든 누구든 외부 공무원이 개입할 수 없다. 사태와 무관한 대통령을 끌어들이는 정쟁성 선동이 더 이상 발붙여서는 안 된다. 선관위를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설치한 이유는 분명하다. 1960년 3·15부정선거와 같은 참담한 관권 개입, 체계적인 투·개표 부정선거가 초래한 헌정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선관위는 안일한 행정 편의주의에 젖어 자신들에게 부여된 헌법적, 국민적 신뢰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훼손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지닌 높은 수준의 주권 감수성과 성숙한 민주 의식은 이 같은 잘못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며 민주사회의 건강성을 증명하는 지표다. 하지만 그 분노의 해결 방식은 근거 없는 음모론의 확산이나 ‘전면 무효화’ 같은 극단적인 주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히 합리적이고 헌법적인 틀 내에서 제도를 뜯어고치는 제도 개선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다. 한인섭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법학). ‘100년의 헌법’, ‘계엄과 내란을 넘어’, ‘가인 김병로’, ‘5·18재판과 사회정의’, ‘배심제와 시민의 사법참여’, ‘권위주의 형사법을 넘어서’ 등을 썼다.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에 대한 심층 대담집으로 ‘이 땅에 정의를: 함세웅 신부의 시대 증언’,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40년 김정남의 진실 역정’, ‘인권변론 한 시대’ 등이 있다. 시민이 주권자로 만들어 가는 헌법과 나라 이야기를 쓴다.
훼손된 주권 감수성…음모론 아닌 합헌적 구조개혁이어야
한인섭의 시민헌법 시대 _13 선관위를 향한 시민적 분노는 십분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선관위의 해체·폐지론이나,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되, 최선진국 수준의 선거관리기구로 리모델링하는 생산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