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 element.0:00벽 l 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고트(2020) 광고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 큰 벽이 생겼다. 벽은 투명하나 공고하다. ‘나’는 사촌의 산장에 쉬러 왔다가 숲속에 고립되고 만다.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마주친 벽 너머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 죽어 있다. 벽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벽 안에서 생존을 시작한다. 사촌 부부가 남긴 개 룩스와 낯선 풀밭에서 만난 암소 벨라, 그리고 천둥을 피해 찾아온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는데, 폐허의 삶은 녹록지 않다. 한시라도 몸을 움직여 먹을 것을 구하고 은신처를 보살피지 않으면 위험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고립과 격리의 세계는 안전과 죽음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매 순간 살아남은 자를 위협한다. 이곳에서 홀로 남은 인간이자 여성인 ‘나’는 섣불리 정복이나 문명의 재건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곁에 남은 존재들을 돌볼 뿐이다. 이때 돌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혜적인 돌봄이 아니다. 처음 암소 벨라를 만나 함께 살기로 결정할 때 ‘나’는 생각한다. “이 소가 나에게 축복인 동시에 커다란 짐이기도” 하다고. 또 자신은 “소의 주인이자 소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고. 오스트리아 작가 마를렌 하우스호퍼는 핵전쟁의 공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한참 전인 1963년에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출간 당시에도 아르투어 슈니츨러 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고루 받았지만, 소설이 뜨겁게 부활한 것은 ‘핵위기’ 시대였던 1980년대였다. 이 소설을 소비주의와 핵전쟁에 대한 비판으로도, 인간 중심 문명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동물권 이야기로도, 생태 여성주의 작품으로도, 고립을 맞은 한 여성의 글쓰기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소설의 층위는 겹겹으로 다각적이다. 심지어 많은 장면이 우리가 불과 몇년 전에 통과한 코로나19 격리 상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누가 언제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독법이 가능한 입체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2026년 여름, 나는 이 소설을 무엇보다 돌봄에 대한 치열한 고찰로 읽는다. ‘나’는 산장에서 동물들을 정성껏 돌보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낳고 키웠던 두 딸을 떠올린다. 다 커서 독립한 지 오래인 두 딸은 ‘벽’ 바깥에서 생존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태이고, 아마 딸들뿐만 아니라 손주들까지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을 거라고 담담히 생각하면서도 ‘나’는 슬픔보다 어린 딸들을 키웠을 때 느꼈던 충만함과 불안을 복기한다. 딸들이 커서 엄마를 덜 필요로 했던 때를 종말로 여기기도 했다. 진짜 종말이 찾아온 지금 ‘나’는 개와 고양이와 암소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비슷한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이면서 노예이기도 한 양가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돌봄이 여성성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보다는 돌봄이 인간을 비롯한 생태 생존의 기본 전제이자 수평적인 연결이어야 하는데, 기꺼이 그 순환에 참여하는 존재와 그 순환을 깨뜨리고 수직 운동으로 만들려는 자가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닐까?광고 가까스로 생태의 순환이 시작된 고립의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도끼를 든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리워했던 동료 인간? 소중한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침입자?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여자의 최종 선택은 돌봄이라는 주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광고광고이주혜 소설가
여성은 돌봄으로 종말을 돌파하는가 [.txt]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 큰 벽이 생겼다. 벽은 투명하나 공고하다. ‘나’는 사촌의 산장에 쉬러 왔다가 숲속에 고립되고 만다.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마주친 벽 너머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 죽어 있다. 벽의 실체가 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