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갑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가 지난 18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에이치디(HD)현대 사옥에서 기업 경영과 스포츠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약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광고‘샐러리맨 신화’ 권오갑 에이치디(HD)현대 명예회장의 또 다른 직함은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다. 1978년 현대중공업 사원으로 입사해 2021년 한국경영학회 명예의 전당 전문경영인 1호로 헌액되는 등 ‘대가’로 인정받았지만, 2002 한일월드컵 유치 실무에서부터 프로축구단 단장·구단주·연맹 총재를 맡는 등 37년간 한국 축구사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긴 ‘찐 축구인’이다. 프로축구 케이(K)리그가 1~2부 기본 체제를 갖춘 것은 내셔널리그(실업리그)가 2부로 재편되면서 가능했는데, 당시 실업축구연맹 회장으로 산파 역을 맡은 이가 그다. 2013년 프로축구연맹 총재로 취임한 이래 허수 관중 철폐, 객단가 산정, 연봉 공개 등 투명 경영은 “바닥까지 친다”는 철저한 반성에서 나왔고, 지금은 3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프로축구연맹 총재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무실 칸막이를 없애는 일이었다. 테이블과 좌석만 갖다 놓고, 선택해서 앉으면 되는 공간 구상은 낯선 것이었지만 업무 효율과 수평적 소통의 중요성을 알리는 메시지로는 충분했다. 총재실을 회의실(직원들이 집현전으로 명명했다)로 개조하고, 교육지원팀을 신설해 구단 최고경영자(CEO)와 직원들을 대상으로 축구 산업·마케팅·홍보 강좌를 연 것은 발전 방향을 공유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일은 혼자 할 수 없다”고 믿는 그가 경기 성남 판교 에이치디현대 신사옥에 새벽부터 출근해 식판을 들고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누구에게라도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언행일치라는 경영 철학에서 나온다. 나서기 싫어하는 그가 “10년 된 약속”을 지킨다며, 프로축구연맹 총재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8일 한겨레와 인터뷰했다.광고 ―13년간 케이리그 총재로 재임하면서 가장 뜻깊은 일은 무엇으로 보는가? “가장 도전적인 과제였던 케이리그 1~2부 승강제 정착,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비디오판독 시스템 1~2부 도입, 표준화된 데이터 생성과 보급 등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간 작업이었지만, 공정성과 팬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무료 표를 근절하고 ‘유료 관중’ 개념을 정착시키면서 케이리그를 소비하는 팬층의 연고 팀 충성도가 강화됐고,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중이 늘었다. 케이리그를 가치 있는 콘텐츠로 인정하는 팬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징표들인데, 이런 것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다지게 된다. 일단 3년 연속 300만 관중이 들어왔고, 케이리그 1~2부 구단이 29개까지 늘어난 것은 구체적인 성과다.”광고광고 ―외부자 시선에서 볼 때 각 구단 임직원을 대상으로 축구산업 아카데미 강좌를 연중 실시했던 것이 가장 눈에 띈다. “기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공정성과 일관된 원칙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단합하고, 방향을 공유해야 한다. 또 이를 잘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연맹에 처음 부임했을 때 행정 역량과 전문성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고, 강사진도 꽤 많이 초청해 구단 운영자들이 재정·홍보·운영 등 실무에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을 했다. 이것이 케이리그를 산업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하고,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는 기초가 됐다. 이런 것이 바탕이 돼 2019년 케이리그2 중계방송을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고, 2021년부터는 직영 방송사를 설립했다. 2019년 말부터 유럽 중계권 업체와 함께 해외 중계권 판매 시장을 새롭게 개척했다.”광고권오갑 총재는 재임 13년간 연맹과 구단의 임직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해 스포츠 조직과 행정이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연맹 직원들은 새로운 변화에 힘들었겠지만, 최종 소비자인 팬들은 수혜를 누리는 것 같다. “2013년 당시 상근 직원 16명이 전부였던 연맹은 현재 3본부 12팀 체제에서 50명 가까이 근무하고, 예산도 2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늘었다. 단순히 숫자가 바뀐 것이 아니라 구조의 질적인 변화도 함께 이뤄졌다.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 인력이 충원됐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역량과 국제 감각을 갖춘 인재들이 지속해서 합류했다. 일부는 해외 구단 및 기관에 보내 경험을 축적하도록 하고 있다. 1990년대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했을 때, 축구 행정 전문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현대중공업 최고의 자원 15명을 축구협회에 파견해 행정력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외부의 도움 없이 연맹이 자체의 인적 역량을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2010년 안팎으로 기억되는데, 수도권 경기장에서 관중을 직접 세어본 적이 있다. 1천명을 조금 넘는 것 같았는데, 경기 뒤 기록지에 6천여명으로 돼 있었다. 허수 관중을 실 관중으로 바꾸려고 할 때 반발이 있었을 텐데? “축구는 산업이고 경영인데, 경영의 기본은 투명성이다. 2018년 초청 손님까지 뺀 전면 유료 관중 집계를 시작했을 때 구단에서는 우려가 컸다. 관중 수치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당장의 숫자보다 축구의 체질을 바꾸고 장기적인 신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단순히 데이터를 공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단들이 사활을 걸고 유료 관중을 모객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광고 ―혁신하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른다. 용기와 리더십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본인만의 비결이 있나? “나는 옳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어려운 대상이라도 건의를 한다. 그래서 바꾼 것도 많다. 대한축구협회장한테도 제일 많이 고언했다. 기업이든 연맹이든 조직이 활력을 갖고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최고의 목표다. 인사도 사장급 정도에는 관여하고, 나머지는 다 맡긴다. 연맹도 지금까지 인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단, 좋은 사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뽑아달라고는 말했다.” ―축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축구는 어려서도 했고, 해병대 장교 복무 때도 했지만, 2002 한일월드컵 유치전에 들어갔을 때부터 뒤에서 많은 지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런던 주재원 시절인 1987년도쯤이었는데 영국 축구의 성지라는 웸블리 경기장을 처음 가봤다. 가는 열차 안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부터, 경기장 안에서 숨죽이며 공을 쫓는 수만 시선의 출렁출렁함에 놀랐다. 축구는 여러 종목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에게도 강원도 강릉 주민들이 강릉농고와 강릉상고의 축구 대결이 벌어지면 남대천에 가마솥 걸어놓고 모두 축제 한마당에 빠졌던 역사가 있다.”권오갑 총재의 에이치디(HD)현대 명예회장실 방에 황소 그림과 전문경영인 1호 헌액 액자 등이 놓여 있다. 옆방에는 샌드백이 있는데, 권 총재는 샌드백을 치며 틈틈이 체력단련도 하고 스트레스도 푼다고 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프로축구연맹 운영에서 기업 경영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나? “분야는 다르지만, 결국 사람과 시스템을 운영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단기 성과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인 방향성과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케이리그 아카데미를 거친 인재들이 실제 구단과 연맹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점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한국 축구의 미래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포츠 시장에서는 팬들의 반응이 매우 솔직하고 빠르다. 팬들의 신뢰와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체감했고, 그런 경험들이 기업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됐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의 축구 참여를 위해 프로축구연맹이 할 일도 있다고 보는데? “1990년대 현대학원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청운중·고, 서울 현대고, 울산과학대 등 여자축구팀을 창단했고, 인천현대제철 창단은 실업리그 조성의 기반이 됐다. 최소한 현대라는 기업이 학교에서 실업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렇게 구축된 시스템 속에서 최근 수원에프시(FC) 위민이 2025~2026 에이에프시(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한국 여자축구는 투자하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종목인데, 유럽처럼 남자 프로구단이 여자축구단을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추기에는 현실적인 과제가 있다. 그럼에도 케이리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꾸준히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026 북중미월드컵 성적은 프로축구 흥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 같다. “대표팀과 프로축구는 ‘운명 공동체’다. 지금 홍명보호에서 활약하는 국외파 선수들도 결국 케이리그라는 텃밭에서 성장했고, 케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대표팀의 든든한 뿌리가 되고 있다. 대표팀의 성과가 리그 흥행으로 이어지고, 리그의 성장이 다시 대표팀의 경쟁력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대표팀 성적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이번 월드컵이 전부가 아니다. 일본 축구의 ‘백년구상’처럼 우리나라 축구도 장기적인 시스템과 철학이 받쳐줘야 리그와 대표팀이 강해질 수 있다. 유소년 육성과 생활체육, 프로리그 경쟁력 등이 함께 성장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케이리그는 한국 축구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각 구단의 유소년 시스템 강화와 젊은 선수들의 발굴·성장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홍명보 감독이 울산에이치디를 떠나면서 팬들의 실망도 컸다. 하지만 케이리그 현직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으로 가지 못한다면 그것도 모순된 것 같기는 하다. 어떻게 보는가? “울산의 구단주이자 연맹 총재로서, 당시 팬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허탈함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국가대표팀의 중요성과 별개로, 케이리그 팬들이 느끼는 감정과 리그의 가치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 케이리그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역량을 인정받은 지도자가 국가대표팀을 맡는 것 자체는 한국 축구 전체의 경쟁력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월드컵 무대에 11번 이상 나간 나라에서 외국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하는 경우는 드물다. 케이리그가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까지 성장시키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홍 감독은 사례가 될 수 있다.” ―2026 북중미월드컵 열기는 과거와 비교할 때 많이 약화돼 있다. 좀 더 다원화된 시대의 반영인가, 아니면 홍명보호가 저평가받고 있기 때문인가? “두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고 본다. 과거와 비교하면 팬들의 축구 소비 방식이 훨씬 다양해졌다. 국가대표 경기뿐 아니라 케이리그, 해외 리그,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축구 팬덤 자체가 더 세분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축구인 모두가 팬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더 세밀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팬들의 다양한 목소리는 한국 축구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할 부분이다. 팬들이 느끼는 실망감과 질책 역시 축구계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본다.”권오갑 총재가 11차례 연속 피파 월드컵에 진출한 홍명보호의 성공을 위해 팬들이 선수단에게 힘을 실어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홍명보호에 대한 평가가 극단화된 경향이 있다. 부정적 묘사로 치닫는 유튜브 프로그램의 영향도 막강하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달성한 ‘11회 연속 월드컵 진출’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브라질, 독일, 아르헨티나, 스페인 같은 세계적인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록이며, 축구 전통 강국인 잉글랜드나 프랑스조차 달성하지 못한 위대한 역사다. 아시아에서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기록한 사건이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성과가 아니라, 수십년간 우리 선수들과 지도자, 그리고 팬들이 함께 일궈온 한국 축구의 소중한 자산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여러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 성취의 의미만큼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갈등과 비판은 축구계가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때 의미가 있다. 그 비판이 월드컵 무대에 출전한 선수들의 노력까지 흔들어서는 안 된다.” ―홍 감독에 대한 호불호는 있지만, 선수단을 향해서는 성원해야 한다는 뜻인가? “선수들이 큰 무대에서 자신 있게 경쟁할 수 있도록 팬들께서도 많은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어야 한다. 월드컵이라는 게 올림픽보다 경제적 규모에서 4~5배 큰 세계적인 축제다. 그런 대회를 11번째 나가는 선수단이다. 그동안 회초리도 많이 들었으니 선수들한테는 따뜻한 시선을 보이고, 감독한테도 그동안 따끔하게 했으니 ‘이제 일 한번 내라’는 식으로 긍정적 자극을 주면 좋겠다. 문제가 있다면 50년이든 100년이든 계획을 세우고 30년 후에는 우승한다는 건설적 대안을 내야지, 지금처럼 대표팀을 과도하게 비판하는 방식은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물론 대한축구협회도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월드컵 이후에 경기 결과와 과정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한국 축구 전반이 한단계 더 진화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개선 과제를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은 월드컵을 앞둔 중요한 시기인 만큼, 국민 모두가 세계인의 축제를 함께 응원하고 즐기면서 우리 선수들에게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다.”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